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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 그리고 부여의 밤  |  국내축제뉴스 2020-07-08 16:35:39
작성자  페스티벌올&트래블 조회  1041   |   추천  45

궁남지, 그리고 부여의 밤

 

 

부여를 찾았던 날에는 남부지역에 비 소식이 있었다. 저녁 무렵부터 하늘이 무거워지는 듯하다가 그대로 밤이 되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호젓하게 산책을 즐겼고, 누군가는 머리를 식히러 부여를 찾았다고 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포룡정과 다리에 조명이 들어왔다. 탐스러운 연잎들이 수면으로 가라앉고 포룡정이 떠오르니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부여의 밤이 시작됐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도 예술의 혼은 남아...백제의 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후대의 몫

 

부여 시외 터미널에 내리자 넒은 하늘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2층 이상 세워진 건물이 드물게 낮고 단단한 건물들이 부여 읍내에 시가지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에 높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시 숲에 시야가 길들여진 탓에 하늘을 하루에 올려다보기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부여의 아늑한 분위기의 절반은 하늘을 이고 있는 낡고 세월을 먹은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부소산성으로 향하는데 바깥에 발굴현장을 덮은 방수 천이 한 블록 너머 다음 구역까지 덮여있다.

 

”아직도 백제 역사지가 발굴되는 곳이 있나 봐요?“ 택시 기사 분께 슬쩍 물어보니 백제 유적발굴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하신다.

 

 

 

“낙화암 구드레 쪽은 오래전에 발굴이 끝났고, 이제 관북리 유적 앞에 시가지를 다시 엎고 있어서...”

 

 

이미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겠지만 융성했던 백제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부소산성 맞은편까지 발굴 범위를 확장한 것뿐이지만 금동 대향로가 발견됐던 그때 현장처럼 후대의 노력이 헛되지 않는다면 부여도 경주만큼 번듯한 유적지가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정림사지 터를 따라 시멘트를 먹인 기와 돌담길을 걷자니 화염에 불타버린 절터에 혼자 남은 정림사지 석탑만 세월을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제가 남기고 간 유구한 문화는 살아남았던 자들의 영광을 장식했지만, 정작 융성한 예술적 부흥을 일으켰던 백제의 원형은 이에 비해 초라하다.

 

그렇게 정림사지에서 오래 걷지 않아 궁남지에 다다랐다. 아스팔트 길을 곧게 올라가다 고개를 들었는데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흐뭇하게 웃음이 났다. 무왕이 선화공주에게 사랑의 증표로 만들었다는 궁남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선화’공주를 사랑했던 서동이 남긴 궁남지, 유적지는 쓸쓸하지만 예술의 혼은 남아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서동은 선화공주를 사모해 서동요를 만든 장본인이다. 밤마다 왕가의 공주가 미천한 서동을 만난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하니 서동이 무왕이 될 수 있는 ‘백제’다운 감각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 ‘신라의 달밤’이나 ‘목포의 눈물’처럼 부여로 배경으로 한 노래는 없을까. 신동엽 시인이 서사시 ‘금강’을 집필할 때 혁명의 상처에 머물렀던 것처럼 궁남지를 머물러 봤어야 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보는 궁남지의 상징인 연꽃도 백제시대에는 없었다고 한다. 1995년부터 궁남지 일대를 발굴한 이래로 연못을 재조성하면서 모티브에 착안하는 과정이 삽입된 것이다.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이곳을 만들었다고 해서, 선화공주의 ‘선화(연꽃)’를 상징으로 삼아 연못에 연지를 심었다고 한다.

 

 

궁남지의 연꽃이 후대의 상상대로 조성됐다고 하니 무상함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 부여읍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발굴현장에 희망을 걸어본다. 발굴을 통해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다면 궁남지의 의문점도 풀리지 않을까.

 


 

현재 궁남지에서 주목하고 있는 곳은 연못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 유적이다. 궁남지를 찾아 곧은 길로 올라가다 보면 작은 동네 슈퍼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게 되는데, 그 길 건너에 화지산 유적이 있다. 문화재 발굴단은 최근 2018~19년도까지 초석 건물지 여섯 개 동과 적심시설, 기단시설, 계단 조성층 등을 확인했다. 또, 팔각우물을 비롯해 백제시대 벼루와 연가, 연꽃무늬 수막새, 도장이 찍히거나 글씨가 새겨진 기와, 녹유자기도 발견됐다. 신라시대의 안압지와 별궁처럼 궁남지에도 거대 연못을 마주한 이궁이 같이 있지 않았나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궁남지에 대한 설화와 추측이 꼬리를 무는 것은 백제가 당대 주변 국가에 끼쳤던 예술의 파급력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문물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신라와 아스카 문화의 흔적을 보면 자연스레 백제의 위상이 그려진다. 현시대에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백제의 흔적을 조감도로만 만날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 궁남지에 얽힌 서동설화를 더 애틋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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